금요일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0장 14절~25절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0: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0: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0: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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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제사는 ‘모형’입니다.
아파트를 짓기 전에 앞으로 지을 아파트의 ‘모델 하우스’를 먼저 만듭니다.
모델 하우스는 실거주가 가능한 건물은 아닙니다.
설계도의 도면대로 가벽을 설치하여 구조를 만들고, 그 안에 각종 인테리어를 하고 가구를 배치하여 앞으로 지어질 아파트를 최대한 미리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모형입니다.
사람들은 그 모델 하우스를 둘러보고, 앞으로 지어질 아파트를 상상하며 큰 돈을 지불하여 계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제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범죄하고 죄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거룩한 하나님께 다시 나올 수 있도록 속죄의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사는 모형이며, 그림자에 불과하였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었던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이 모든 제사의 완성이며, 우리를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세우는 단번의 제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의지하여서 언제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20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새로운 살 길’이라고 이름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원문의 성경은 두 가지 방식으로 갈리어 번역됩니다.
첫째는 우리가 읽은 성경과 같이 우리를 살리는 ‘구원의 길’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 길을 ‘살아있는 길’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둘 중에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히브리서를 쓴 사람은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도록 이와 같은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어휘는 모호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통해 이해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살 길이며, 동시에 살아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본문은 이렇게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 마음은 ‘진실한 마음’을 뜻하고, 온전한 믿음이란 ‘충만한 믿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본래 우리에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악한 양심’ 그러니까 ‘죄책감’에 시달리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을 때에, 그 (피)뿌림을 받아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맑은 물로 씻음’은 세례를 의미하는데, 보다 본질적으로 성령세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을 때에, 죄책감이 해결되고 성령을 받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진실하게 되고 거기서 충만한 믿음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꾸만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다보니, 많은 신자들이 도덕적으로 실패하고 자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은 죽은 길이요, 또한 신자의 양심을 죽이는 길입니다.
그런 종교생활로는 결코 예수님을 경험할 수 없으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유감스러운 사실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기독(基督)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종교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의로움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신자의 의로움은 오히려 구원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참고, 이해하고, 기다리고,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고, 이해하고, 기다리고, 도와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리는 유연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딱딱하고 많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흉기가 됩니다.
그러나 은혜는 유연하고 각 사람에게 적당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성경을 여러분이 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성경이 살아나고, 여러분 각자에게 은혜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상대에 대하여 인격적으로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주일을 지키고, 연보를 바치고, 음주를 금하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하나의 단호한 입장만으로 여러분을 정죄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대화하기를 원하시고, 그 대화를 통해 여러분 각자에게 가장 적당한 길을 제시하고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을 들었던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요 8:11)
예수님이 이런 분인데, 과연 여러분의 허물에 대하여만은 결코 용서하지 못하겠다, 나는 이것만은 참을 수 없다고 하실 것 같습니까? 그럴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를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죄까지는 용서받을 수 없을 거야… 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같은 죄를 용서하시는(마 18:22) 예수님의 자비를 우리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악한 양심, 곧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참 마음, 곧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믿음이 역사하여 충만하게 되고, 우리가 살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평강입니다.
자기를 고만 괴롭게 하십시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당신을 당신도 안아주고, 사랑해 주십시오.
그것이 복음이고, 믿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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