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내가 누구를 보내며
이사야 6:6~13
(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6: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6: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6: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6: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6: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6: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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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태어나 1972년에 세상을 떠난 금세기 최고의 유대교 학자인 아브라함 요슈아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은 말하기를,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심도 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어서 말하기를, “이는 마치 하나님이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인간을 선택하여 당신을 섬기게끔 하신 것 같다. 그러므로 성경에 묘사된 인류의 역사는 다음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신다.’”<[사람을 찾는 하느님](한국기독교연구소)>
시편42편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성경은 분명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존재’인 것을 알려주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야말로 사람을 끊임없이 찾고, 부르시는 분’이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수치심에 몸을 숨겼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찾고 부르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장9절)
출애굽기 3장에는 호렙산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출 3장4절)
사무엘을 세우실 때도 그를 세 번이나 부르셨던 것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삼상 3장)
이처럼 성경은 ‘사람을 찾으시며 부르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결국 우리를 먼저 불러주신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환상이 열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선지자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선지자를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모르고 살아가다, 어느 날 집안으로 햇살 한 줄기가 들어왔을 때에 그 햇살이 무수한 먼지가 흘러다니는 것을 보여주듯, 선지자는 인품으로는 훌륭한 사람이었으나, 완전하신 하나님에 비하여 보았을 때에는 한없이 초라하고 불결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을 얻기까지 그 사실을 감히 발견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자랑하고, 우쭐대고, 자신만만하게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그 모든 자기 중심적인 생각들이 한없이 초라하고 엉터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만은 보편적이고, 그 교만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첫 걸음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참된 회개가 있습니까? 있기를 바랍니다.
교만한 인간이 스스로 죄를 깨닫는다는 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임재 가까이에서 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는 그 때에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천사가 하늘의 제단에서 숯불을 가져다가 선지자의 입술에 대어주고, 이제 그의 모든 부정함이 해결되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6: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6: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구약의 제사에서 숯불이 사람을 속죄하는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본문을 보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소명을 주시는 사건의 배경이 되는, 6장의 1절을 눈여겨 봐야 합니다.
거기에는 ‘웃시야 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웃시야는 임기의 말년에 하나님 앞에서 씻지 못할 죄를 짓습니다.
그것이 ‘성전 분향단 사건’입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자만에 빠진 웃시야 왕은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일인데, 왕의 권위로 그것을 침해하려 했던 것입니다.
왕을 아무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역대하 26장을 보면, 결국 이 사건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웃시야 왕은 한센병, 그러니까 문둥병에 걸리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은 제사에 쓰여지는 불조차 거룩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배는 사소한 것이 없이 모든 것이 거룩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우리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세상에 홍수가 나면, 물이 없어 사람이 죽는다고 합니다.
얼핏 들으면 이해가 가지 않지만, 홍수는 세상의 모든 깨끗한 물을 오염시키지 때문에 먹을 물을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무 물이나 함부로 마셨다가는 수인성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사람은 찾기 힘이 듭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강렬하게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내가 필요하고, 나를 통해서만 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이, 본문이 말해주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달되어서, 우리도 이사야 선지자처럼 하나님께 응답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배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하며 하루를 보내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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