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요 1:14)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 일요일 (부활주일)

일요일  - 부활주일 
내가 주를 보았다


요한복음 20:11~18

(20: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20: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20: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20: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20: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20: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20: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20: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20: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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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아침을 축하드립니다.

금년도에는 특별히 이렇게 ‘새벽예배’를 열게 하시고, 마지막까지 은혜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하루를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 여러분에게도 기쁘고 감사한 은혜의 경험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있어 가장 중심적인 증인은 12사도가 아닙니다.

물론 베드로나 사도요한(2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도 부활의 목격자입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 20장은 특별히 한 여인을 강조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당시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여자에게 매우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그 출신을 붙여서 사람을 구별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지방의 ‘막달라’라는 도시 출신의 마리아라는 뜻입니다.

‘막달라’는 갈릴리 호수의 서안에 위치하였고, 염색과 직물업이 발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산업이 발달하여 도시가 형성된 곳들은 대부분, 순박한 시골의 마을보다 더 도덕적 타락을 겪어야 했습니다.

당시에 막달라 역시 부패한 도시로 악명을 가졌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대부분 의미 있거나 보람 있는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과연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방탕한 삶은 당장은 즐거운 쾌락으로 양심을 마비시킬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그 후과를 혹독하게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방탕하게 살고도 끝이 좋은 인생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겪은 인생의 사연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그녀는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여인으로 나옵니다.

그 후로 막달라 마리아는 고향을 떠나 예수님의 일행을 따르며 수발을 도왔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동행하다가 마지막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장면에도, 그녀는 도망가지 않고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는 여인들 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그 부활의 소식을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전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그녀를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혹자는, 나사로의 동생으로 소개되는 ‘마리아’를 막달라 마리아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헌신한 여인들의 이야기는 혼재되어 있어 확실하게 구별하거나 단언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이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한 여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7: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7: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님은 세상에서 이유 없는 미움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옳은 말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공의롭게 행동했기 때문에, 불의한 사람들은 예수를 싫어하고, 비방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위로를 얻고, 소망을 찾았던 사람들은 지극히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특별히, 많은 죄에서 돌이킨 죄인들이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붙었던 여인입니다.

그녀의 인생은 이미 끝장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정신이 온전하게 돌아온 것만이 아니라, 누구보다 예수를 사랑하고, 마지막까지 두려움을 이겨내고 예수님과 동행하여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그녀는 부활의 예수님을 보았고, 또한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고통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또한 많은 재물과 성공과 여유로움이 반드시 좋은 것인지도 의문이 듭니다.

인생은 결국 결과로, 성경적 언어로는 그 열매로 판가름이 납니다.

열매가 좋은 인생은 복된 인생이고, 열매가 형편없는 인생은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결말에 이를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이 예수를 만나고, 의지하고, 은혜를 받고, 은혜를 갚는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변장된 축복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인생이 고되고 힘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새벽예배를 끝내시지 말고, 여러분의 힘으로 다시 새벽을 깨우십시오.

그리고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신 예수님은, 분명히 여러분도 만나주시고, 여러분에게 따뜻한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여러분의 고통은 오히려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일곱 귀신이 떠날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트라우마가 아니라 스티그마가 되어줄 것입니다.

수치는 변하여 자랑이 되고, 눈물은 변하여 감사가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겠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믿음으로 움직이고 선택한다면, 반드시 그 믿음은 좋은 열매를 여러분에게 선물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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